무엇으로 평생의 도道를 삼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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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각 종교에 믿음은 많다. 하지만 불교의 관점에서 본다면 바른 믿음[正信]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싶다. 만약 주관 밖의 어떤 객관적 대상을 믿게 되면 그것은 바른 믿음이 아니다. 그렇다고 객관의 대상이 없는 주관만이 있다면 이것 또한 바른 믿음이 되지 않는다. 주관과 객관이 완전히 사라진 믿음이라야 진정한 정신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모른다.
불교에서 말하는 참 믿음이란 믿는다고 하는 것까지 끊어진 자리를 말한다. 주객이 끊어진 믿음인 실견득實見得을 성취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유를 넘어선 믿음이므로 일반인들에게는 너무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을 목표로 삼아서 나가야 한다. 《반야심경》에 나오는 ‘이무소득(以無所得; 하는 바 없이 얻음)’처럼 믿음도 무소득無所得이 되어야 한다.
옛날 어떤 학자가 사마온공司馬溫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평생을 행할 도입니까?”
그러자 사마온공이 대답했다.
“성(誠; 진실하여 망妄이 없음)이다.”
학자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먼저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사마온공이 대답했다.
“망령되이 보지 말고 망령되이 말하지 말라.”
이와 같이 보지 않을 것은 보지 말고, 말하지 않을 것은 말하지 말며, 바로 보고 바로 말하는 것으로 성을 행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또 세상에 처세할 때는 부드러운 것이 좋고, 강하고 굳센 것은 화禍의 근원이 된다고 했다. 공자와 안연의 대화를 살펴보면 처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아무인無我無人, 즉 주객이 끊어진 행行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학자와 사마온공의 문답에서 보았듯이 망령되이 보지 않고 망령되이 말하지 않는 것이 차선次善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시전詩傳》 3백 편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런데 이것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생각에 삿됨이 없다”라고 할 수 있다. 《시전》을 ‘사무사思無邪’라고 말한 것은 중中의 자리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또 이 책을 성인의 경전으로 받드는 것도 바로 사무사 때문이다.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즉 모든 생각이 일어나기 전을 중中이라고 한다. 중이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자리이지만 희로애락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니 일단 생겨났다가 다시 절차에 합하는 것이 중인데, 성인도 그것이 없을 수 없지만 일어났다가 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성誠이다.
따라서 본래 진실해서 망상이 없는 자리는 천도天道이며, 진실 무망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사람의 도[人道]다.
그러므로 본래부터 진실 무망한 데서 밝아진 것을 성誠이라 하고, 밝은 자리로부터 밝아져서 진실 무망인 것을 교敎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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