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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과 근기에 따라 수행법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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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했지만 불교 경전은 매우 체계적으로 되어 있다. 그중에서 인천교人天敎는 불교에서는 유치원 수준의 가르침에 해당한다. 그 다음에 초등학교에 해당되는 소승성문승小乘聲聞乘이 있고, 중학교 수준의 소승연각승小乘緣覺乘이, 고등학교는 대승보살교大乘菩薩敎가 있으며, 대학교 수준의 대승실교大乘實敎가 있다. 

《법화경》이 대승실교가 된다.그러나 법 자체에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다. 즉 인천교를 《화엄경》 보살이 닦으면 상상십선법上上十善法이 된다. 그래서 10악 자체가 그대로 도道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두 명의 비구가 있었다. 한 명은 살계殺戒를 범했고, 다른 한 명은 음계»Z戒를 범했다. 이 경우 반드시 법의 선배를 찾아가서 참회를 해야 하는데, 당시에 우바리 존자가 지계持戒 제일로 유명했으므로 그 앞에 가서 참회를 구했다.

“우리가 살계와 음계를 범했으니 잘못했습니다. 참회를 허락해 주십시오.”

그런데 우바리 존자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며 호통을 쳤다.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출현해도 불통不通 참회다.”

이렇게 되면 두 비구는 영원히 매장되는 것이다. 구원받을 길이 없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유마 거사를 찾아갔다. 

유마 거사한테 찾아가서 사실을 털어놓고 참회를 구했다.

그러자 유마 거사가 그들에게 말했다.

“죄상이 있으면 내게 가져 오너라. 그러면 참회시켜 주겠다.”

그런데 죄의 모양이 어디 있는가? 죄의 모양이 본래 없는데 어디다 갖다 바치고 어디다 대고 참회를 할 수 있는가? 참회를 할 사람은 누구고 받을 사람은 누구인가?

따라서 밝은 태양에 눈이 녹듯이 법 하나를 가지고 우바리 존자가 닦은 것은 10선법이 되고, 유마 거사가 닦은 것은 상상십선법이 된 것이다.

그래서 소승성문승이 닦는 것으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四諦法이 있다. 이때 고苦만 해도 수천 가지고, 집集도 수천 가지, 멸滅의 법도 수천 가지, 도道의 법도 수천 가지가 있다. 이 수천 가지가 되는 것에 대해 소승불교에서는 이렇게 말을 한다.

 

고苦가 무서워서

고를 만드는 집착을 끊고

망상을 멸하는 도를 닦는다.

 

그런데 《화엄경》 보살은 같은 10선법을 닦는데 4성계四聖戒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苦가 곧 도道다.

망상은 본래 마음이 없는데 누가 끊는가?

 

이렇게 같은 법을 가지고도 닦는 법이 다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자신의 안목과 근기에 따라 수행법도 다를 수밖에 없다.

 

꿈인 줄 알면 해결되는 지혜

 

오늘날 현대사회가 처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최근 들어 서양의 대학교수들이 우리나라에 자주 다녀갔다. 우리가 서양사회와 문화를 동경하는 데 반해, 서양인들은 원자핵이나 다른 물질문명의 발달로 자멸위기에 봉착해 있다고 생각하여 그 위기 극복의 대안으로 동양의 정신문화를 연구하기 위해서다.

서양인들의 양단론兩端論은 유有는 유이고 무無는 무일 뿐이며, 인간과 자연도 서로 모순되므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오직 대립과 투쟁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는 이론인데, 이것이 오늘과 같은 서구 문명을 낳고 인간과 자연의 대립을 일으켜 결국 자연으로부터 보복을 받고 있다. 또한 극단적으로 대립하게 되니 생명에 위협을 받고 위기의식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상의 복잡함을 피하기 위해서 무조건 안정만을 추구한다면 문제 해결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여기서 동양 사상의 진가를 알 수 있다. 동양 사상에서는 세상이 아무리 복잡하고 힘들어도 허공에 고요히 앉아서 생각해 보라고 제안한다. 그러면 삼라만상이 괴로울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 전부가 내 것이니 말이다.

백천중류百千衆流는 천만 년을 흘러도 쉬는 법이 없다. 바다를 볼 것 같으면 육지에서 모든 냇물이 내려와서 바다로 들어가지만 어떤 물이든 일단 바다에 들어오게 되면 짠맛이 되지 다른 맛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다는 원래부터 크고 한량없기 때문에 육지의 백천중류가 바다 맛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의 삼라만상이 허공에 이르면 하나가 된다. 허공에서는 우주 삼라만상이라는 것에는 차별이 없다. 마찬가지로 성인聖人의 입장에서 보면 위기가 있더라도 그것이 위기가 되지 않는다. 본래 빈자리라는 것을 확연히 봤거나 믿거나 체득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는 위기다, 불안이다 하는 것도 본연의 자리에서 말하면 본래 불안이 없으니 해소할 것도 없고 본래 위기가 없으니 안심할 것도 없다.

꿈속에서 큰 다이아몬드를 하나 얻어서 분명히 장롱 속에 넣었는데, 꿈에서 깨어나 장롱을 아무리 뒤져도 다이아몬드는 온데간데 없다. 도대체 어느 것이 진짜인가? 꿈이 진짜인가? 꿈을 깬 상태가 진짜인가? 인생은 대몽大夢이다. 중생은 꿈을 진짜라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반면 부처님은 이 대몽을 깬 분이기 때문에 중생에게 희로애락, 그 모든 것이 꿈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만상은 실체가 없다. 전부가 환이요, 허상인 것이다. 어느 한 순간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부단히 변화하다가 결국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꿈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꿈속에서 보는 물건이라도 찬 것은 차고 뜨거운 것은 뜨거운 것이다. 이것이 중생의 실상이다. 그래서 꿈속에 있는 사람에게 꿈속의 사실이 헛되다고 말해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꿈속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꿈에서 깨는 것밖에 없다. 아니면 누군가 그 꿈을 깨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길밖에 없는데, 꿈꾸는 사람에게 아무리 꿈에서 깨라 해도 깨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잠꼬대하는 사람에게는 잠꼬대하는 것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다. 요즈음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 불교 경전에 관한 글을 한 줄도 넣지 않으니,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한단 말인가.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이렇게 난감하지 않았다. 그때는 중학교 교과서만 해도 유교의 《논어》, 불교 사상 등 성인의 말씀이 필수과목이었다. 또 전문학교에서는 역학, 노장 사상老莊思想, 불교 철학을 필수로 가르쳤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이러한 과목을 가르치는 곳이 없다 보니 잠꼬대하는 사람에게 당신이 지금 꿈속에 있다고 아무리 말해 줘도 이해하지 못한다.

동양 사상이 학교교육으로 제도화된다면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 스스로 그것이 꿈인 줄 알고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