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광사의 유래- 대전 자광사 천수회 강 자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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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광사의 유래- 대전 자광사 천수회 故강 자비행- 생명불교32호 - 선방자랑
< 故강 자비행님은 자광사의 중창불사에 큰 역할을 하신 분이며 2016년에 100세의 연세로 입적하였습니다. 아래의 수필은 작성일자 및 출처의 정보를 알 수 없고 자광사 신도인 도원행이 보관하고 있던 글입니다.>
나이 탓에 예전과 달라 할 말이 잘 생각나지 않으나 자광사 유래를 한 말씀 드릴까 합니다.
경상도 봉화군에서 35살 때 자광사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함석집 밖에 없었고 진주에서 오신 강일봉스님이 이 터를 사서 12년이 넘도록 공부를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한문도 가르치면서 많은 인재를 키워내기도 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느 날 고향으로 가시게 되었고, 유성에 사시는 병원 하시는 성원장님이 사시게 되었습니다. 관세음보살님을 한분 모시고 보문고등학교 총무이신 한길로 법사님께서 8년 동안 학교를 출퇴근 하면서 절을 운영해 나가셨고 ‘‹자광사’이름도 짓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길로 법사님이 서울로 발령이 나서 가시고 비구니스님 세 분이 약 10년을 계셨는데 신도도 많아지고 절 운영이 잘 되어갈 즈음 탄허스님께서 유품을 보관하려고 충남 여러 곳을 다녔지만 그 어느 곳 보다도 이 곳이 터가 좋아 나중에 대보살이 날 터이고 여러 스님이 득도할 터라고 예언을 하셨습니다. 그 이후 비구니스님께서는 삼덕사로 가시고 탄허스님께서 절을 사시게 되어 장경각을 짓고 화엄경을 방이 꽉 차도록 쓰시고 탄허스님 속가의 누님이 공양주로 뒷바라지를 하셨습니다. 어느 날 탄허스님께서는 정월 보름 생신법회에서 3월 외국에 갔다 오면 절을 짓게 되는데 각국 사람이 다 모일 대 도량이 될 거라며 모두가 합심해주길 원하시며 외국에 가신지 얼마 후 귀국하셨지만 몸이 위중하셨고, 그해 4월에 오대산에서 입적하셨습니다.
그 후에 탄허불교문화재단이 설립되었고 보경스님께서 5년을 계시면서 무척 고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보경스님께서는 안 보이셨고 신도님 3명 뿐, 갖추어진 거라곤 아무것도 없고 주지스님으로 오신 원행스님께서는 저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며 도와달라고 하셨지만, 쌀 한 자루 연탄 한 장 없는 절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엄두도 나지 않는 저에게 할 수 있다고 마음으로 도와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마지못해 회장 소임을 맡기로 하고 손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 69세였습니다. 옷도 하나도 없이 스님께서는 맨몸으로 오셔서 탄허스님께서 입으셨던 떨어진 헌 옷을 주면서 입을 수 있게 해달라는 말씀에 동네 분 15명을 모아 옷도 함께 만들며 자광사를 도와야 한다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 후로 동네 분들과 곗돈을 모아 쌀 한말, 연탄을 보시 받고 또한 모두 신도가 되어 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곧바로 3월 초하루에 화엄불사를 시작하셨고, 그동안 손수 써놓으신 화엄경을 머리에 이고 대밭으로 꽉 찼던 도량을 돌았습니다. 오대산 신도, 해인사 신도 등이 구름처럼 몰려 들었고 다행히 불사가 잘되었고 또 다시 스님께서는 시민회관에서 전국에 계신 스님과 신도님들을 초청하여 행사를 했습니다. 멀리서 오신 스님들을 극진히 모셔 불편이 없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7월 모아진 불사금으로 자광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마침 둘째 아들이 포크레인 사업을 하고 있을 때라 부탁을 해서 자광사 대나무를 다 뽑을 수 있었습니다. 가을까지 터를 다져서 이듬해 봄에 절을 지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이곳에 살던 제가 아무래도 나을 거라며 저를 믿고 스님께서는 부탁을 하셨습니다. 포크레인이 부족 할 때라 낮에는 회사일 밤에는 자광사일로 몇날 며칠을 꼬박 새가며 아들은 도와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서울, 강원도 오대산에 계신 신도님들께 엽서를 띄워 모두들 도와주었지만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돈이 없을 때 스님께서는 장경각에서 문을 걸고 통 거동조차 하지 않으려 하셨습니다. 몇날 며칠을 굶으신 적도 계셨고 그럴 때마다 창문을 떼고 들어가 스님을 뵙고 죽이라도 잡수시길 권하고 기운이 하나도 없을 때에는 병원으로 모시고 가 영양제를 맞게 해드렸습니다.
참으로 힘들었기에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이렇게 남아 있나 봅니다. 나중에는 아들 집은 물론 총무 집까지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기도 했습니다. 3층 절을 짓고 종각 짓고 터를 다지고 하는데 거의 8년 정도 걸렸고 매달 방생을 15대씩 갈 정도로 신도님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문짝, 벽돌 값들로 빚이 2억 정도 있었고 다 마무리 못한 상태에서 자광사를 떠나셨고 무주에서 스님이 오시기로 하셨다고 재단 측에서 말씀하셨고 전 저대로 불사 중이라서 극구 안된다고 하였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재단에서 모든 걸 잘 마무리해 주었습니다.
무주에서 오신 스님은 1년 정도 계시다 가시게 되었고 점점 신도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로도 보경스님께서 만 7년을 계셨고, 2002년 7월에 지금의 주지스님이신 청아스님께서 오셨습니다. 자광사에 와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오남매 원하는 대로 학교 보내고 유학 보내고 훌륭하게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부처님께 한마음으로 임하고 늘 감사한 마음으로 생활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러 보살님, 비로자나 부처님이 모셔진 곳은 대전에서 자광사 뿐입니다. 기도하면 기도한 만큼 되고 뜻한 바 원하는 대로 됩니다.
마지막으로 자광사가 잘 되길 기원하며, 신도님들이 서로 협조하여 잘 해나가길 바랍니다. 너무 고맙고 감사드립니다.
글 : 대전 자광사 천수회 故강 자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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